와인을 처음 만난 것은 호텔이었다. 수정같이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검붉은 포도주. 그것은 마치 피와 같았다. 가녀린 스템을 조심스럽게 잡고 커다란 잔을 기울이면 코끝은 자연스럽게 잔의 주둥이로 들어간다. 향기를 극대화 시켜주는 마법이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의 질감은 부드럽고 묵직하다. 그 어떤 액체보다 관능적이다.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1986년 기준 국내 포도주 시장은 98억 원 규모에 불과했다. 수입 포도주는 관세 100%를 포함한 각종 세금은 무려 194%가 붙었다. ‘포도주’, 특히 ‘수입 포도주’는 아무나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소주나 맥주처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1987년 이전까지 수입 와인은 무척 귀한 존재였다.
포도주는 국내에 ‘호텔’이 등장한 구한말과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일제강점기부터 빠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저 만찬용 건배주나 특별한 날을 위한 ‘구색’에 불과했다.
1940년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단편소설 ‘탐구의 일일’에서도 등장인물 현우는 애인 혜경의 생일에 호텔에서 만찬을 준비한다. 그리고 ‘뽀이’에게 포도주를 주문한다. 다른 테이블은 일본술과 맥주였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미국문화가 직수입 됐지만 고급 와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미국은 와인의 세계에서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텔은 역시 호텔이었다. 주한 외국인들을 중심으로 수요는 존재했기 때문이다.
1981년 10월 17일 매일경제의 기사는 호텔신라에서 열린 아메리칸 요리 페스티벌 소식을 전한다. 미국대사관이 주최한 이 행사에 참석하면 미국산 와인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1986년 11월 신라호텔에서는 보졸레누보 페스티벌이 열리며 다양성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국내 특급호텔이 취급하는 와인의 종류가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시기는 80년대 후반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 이전에는 손님들이 찾지 않는 와인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소믈리에’의 존재감 역시 미미했다. 1985년 신라호텔 ‘라 콘티넨탈’에 근무한 이호웅씨는 제28회 국제기능올림픽 ‘웨이터서비스’ 부문 출전을 위해 일본 오사카행 비행기에 오르며 매일경제 지면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국제기능올림픽 ‘웨이터서비스’부문은 외국어구사능력, 칵테일조주, 커피서비스, 꽃꽂이와 함께 와인·샴페인 서비스를 테스트했다. ‘웨이터’가 소믈리에 역할을 상당 부분 커버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가 결정되며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했다. 특급호텔은 ‘세계화’를 내세우는 정부 시책의 첨병 역할을 했다. 수입되는 와인의 종류는 크게 늘어났고 ‘소믈리에’라는 직업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90년대는 수입 자유화 조치와 경제의 고도성장과 맞물리며 와인 업계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시기다. 1997년 동아일보 기사에 등장하는 신라호텔 ‘와인 스튜어디스’ 이미경씨 인터뷰 기사를 보면 올림픽 직전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당시 국내에 활동하는 소믈리에는 100여 명인데 여자는 단 3명에 불과했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당시 신라호텔에서 취급하는 와인은 이미 300여 종에 달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특급호텔은 150종 내외의 와인을 보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각별한 와인 사랑도 신라호텔의 수준을 꾸준히 끌어올리는 숨은 힘이 됐다.
1997년말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며 경제는 얼어붙었지만 와인 소비의 증가는 꾸준히 이어졌다. 1998년 5월 22일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은 국내 처음으로 와인저장소(와인셀러)를 완성한 기념으로 ‘와인 앤 다인’ 행사를 연다. 나인스 게이트 그릴에서 7코스의 정찬 디너와 함께 제공된 와인은 여섯 가지였고 소믈리에가 각각의 와인을 소개했다. 최근 개최되는 와인 관련 갈라디너 행사와 비슷한 형태다.

밀레니엄을 지나 21세기로 접어들며 와인 업계는 폭풍성장을 거듭한다. 와인 수입사 관계자들이 말하는 ‘피크’는 2007년이다. 성장기 초반 특급호텔 위주였던 와인 문화는 청담동 등지에 고급 레스토랑이 속속 오픈하며 지평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2010년 이후 와인업계의 폭풍성장을 주춤하기 시작했다. 소비층이 넓어지며 와인시장은 레스토랑이 아닌 가정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트, 백화점의 비중이 커지며 ‘저렴한 가격’을 내세우는 출혈 경쟁이 본격화 됐다. 인터넷과 모바일의 발달로 가격이 오픈되고 해외에서 저렴한 가격에 와인을 경험했던 계층들이 늘어났다.
2010년 이후 특급호텔은 여전히 ‘갑’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요즘 와인시장에서 입지는 예전 같지 못하다. 2015년 현재 국내 와인시장 규모는 5000억 원 수준이며 호텔이 소화하는 물량은 이 중 5%정도인 250~300억 정도로 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위기를 가장 심각하게 감지한 것은 현장의 소믈리에였다. 그들은 난세를 헤쳐 나갈 방법으로 전문성과 차별화라는 정공법을 택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차별화된 와인리스트다.
JW 메리어트 동대문스퀘어 서울의 정하봉 소믈리에는 와인리스트 작성 기준에 대해 아래“첫 번째, 가격대비 와인 품질의 우수성(객관적인 자료 우수한 대회 메달 혹은 로버트 파커 점수, 와인 스펙테이터 100대 와인 선정 및 기타 와인잡지의 수상경력)과 두 번째는 3사 마트(롯데, 홈플러스, 이마트)에 판매가 되고 있지 않은 와인, 세 번째는 라벨의 독창성 및 매력성 혹은 상업적으로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와인” 세 가지를 꼽았다.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소믈리에 입장에서, 특급호텔은 포기하기에 아까운 무대다.
정하봉 소믈리에는 “호텔의 전체 마스터 와인리스트 종류만 400개가 넘게 관리를 해야 되기 때문에 소믈리에로서의 차별화된 리스트를 펼쳐 보일 수 있는 좋은 장이며, 더불어 호주, 미국, 칠레, 아르헨티나 등 와인 관련된 전문인 세미나도 호텔에서 열리기 때문에 꾸준하여 역량을 개진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져 좋은 직장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메리어트 이그제큐티브 아파트먼트 서울에서 와인을 책임지는 김명희 소믈리에(9년차)도 “호텔을 찾는 와인 애주가들과 소통할 수 있는 부분이 좋고, 단순히 손님과 직원이 아닌 와인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부분”을 호텔에서 일하는 가장 큰 의미라고 설명했다.

호텔 소믈리에들은 하우스 와인 선택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와인이 일상화되며 가볍게 식사와 곁들이는 테이블 와인의 매출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리츠칼튼 서울 호텔 역시 하우스 와인을 중요하게 여긴다. 16가지 와인을 정기적으로 교체하며 다양한 스타일의 손님에게 맞춰 와인을 제안하고 있다.
호텔 관계자는 “최근 들어 음식과의 조화, 본인의 선호 스타일등으로 와인을 선정하거나 그날의 기분, 날씨 등을 고려해 와인을 선택하는 고객들이 많이 늘어나, 다양한 와인을 구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신세계 조선호텔은 샤토 라피트 로칠드와 함께 신규 하우스 와인 '라피트 프라이빗 리저브 뽀이약’ 레이블을 올해 2월부터 내놓는다. 이른바 ‘5대 샤또’ 중 하나인 샤또 라피트 로칠드가 한 호텔이나 기업을 위해 와인을 선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와인 레이블은 라피트 로칠드 그룹의 마케팅 책임자인 장 뤽 뱅상(Jean-Luc Vincent)에 의해 조선호텔의 이미지가 결합된 모습으로 라피트 로칠드에서 직접 디자인됐다. 보르도에서도 최상급 레드 와인 명산지인 ‘뽀이약’ 마을에서 재배한 까베르네 소비뇽 70%, 메를로 30%를 블렌딩 해 양조했으며, 오크 배럴에서 숙성해 복합미를 더했다. 진한 과일 향과 은은한 시가 향, 실크처럼 부드러운 감촉을 지녔으며 입 안에 긴 여운을 남긴다. 조선호텔은 지난 2013년에도 아르헨티나 최대 와이너리 트라피체와 함께 독점 하우스 와인 핀카스를 선보인 바 있다. 라피트 프라이빗 리저브 뽀이약은 서울과 부산 웨스틴조선호텔, 포포인츠 바이 쉐라톤 서울 남호무랑 등 신세계조선호텔이 운영하는 모든 호텔과 식음업장에서 판매된다.
이준행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수석 소믈리에는 “하우스 와인은 호텔이나 레스토랑의 얼굴이다. 한국 호텔 명가(名家)인 조선호텔의 이미지를 맛과 향으로 구현할 수 있는 와이너리를 찾았었다. 와인 최고 명가 샤또 라피트 로칠드가 최적의 파트너라고 생각해 협업을 제안했었다”라며 “예전에는 와인의 품종을 중요시 하지 않고 레드, 화이트 같이 색깔로만 결정을 했다. 요즘은 와인의 대중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포도품종의 대한 선호도가 확실해진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우스 와인을 선택할 때 어떤 품종인지, 그날 음식은 무엇인지에 따라 와인의 선정을 달리하는 등 와인을 선택하는 기준도 구체적이고 많아졌다. 하우스 와인은 다양하게 운영할 수 없지만 다양한 품종의 글라스 와인을 준비해놓는 것이 현재 와인을 소비하는 고객들의 니즈를 맞출 수 있는 방법이다”라고 덧붙였다.

와인 애호가들에게 호텔 레스토랑은 친숙한 공간이다. 수입사들이 진행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연중 꾸준히 열리기 때문이다. 수입사들은 호텔에 와인을 공급하며 일정부분 매출을 책임져 주는데 갈라디너라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와인 애호가들은 호텔에서 마시는 와인 한 잔을 여전히 특별하게 여긴다. 럭셔리 호텔이라면 특별한 날 각별한 사람과 함께 마시는 한 잔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레스토랑이 아닌 룸에서 와인잔을 부딪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인생의 ‘화룡점정’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_ 전경우 스포츠월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