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당일 눈이 내렸다. 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이지만 1월에 내리는 눈도 아름다웠다. 특히 길게 가로로 난 창을 가진 온달에서의 풍경도 일품이다. 장독대에 소복이 쌓인 눈을 창밖으로 바라보니 자연스레 마음이 차분해졌다. 창가에 선 하영철 총주방장도 한동안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30년을 워커힐에서만 보낸 올곧은 마음이 눈처럼 하얗게 닮았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하영철 총주방장

대한민국에 호텔조리학과가 처음 생긴 건 1984년이다. 그 전에 경희대학교에서는 식품영양학과 내 조리전공이 있었다. 물론 호텔산업에 중추적인 인재를 배출한 학교답게 조리전공인 훌륭한 선배도 많았지만, 정확하게 ‘제1회 호텔조리학과’ 입학생 중 성공한 이를 뽑으라면 하영철 총주방장이 빠질 수 없다.

“대학 입학할 때가 되어 아버지 친구분이 브로슈어를 하나 가져다 줬습니다. 그분은 경희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계셨는데 호텔관련 학과들이 많이 소개가 되었죠. 호텔경영학과, 일어통역학과, 식품영양학과 등이 있었는데 유독 호텔조리학과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알 수 없는 끌림이 있었죠.”

이렇게 제1회 호텔조리학과 입학생이 된 하영철 총주방장은 첫 학기를 대부분 술로 지새웠다. 당연히 학점도 형편없었다. 다행히 2학기에는 정신을 차려 좋은 성적을 받아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받게 됐다.

“당시 경희대학교와 워커힐 호텔이 MOU를 맺어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워커힐 장학금이었죠. 장학금을 받은 탓에 4학년 겨울 방학도 없이 바로 워커힐 호텔에 취업하게 됐습니다.”

하영철 총주방장이 졸업한 1987년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인해 호텔 업계가 무섭게 발전하던 시기였다. 하영철 총주방장의 졸업동기들은 본인의 의지가 있다면 100% 취업이 가능했고, 서너 곳 합격한 뒤 더 나은 조건을 찾아 골라 가기도 했다. 워커힐 장학금의 수혜자였던 하영철 총주방장은 1987년 1월 1일부로 워커힐 호텔에서 정식 발령을 받았다.

“입사 당시 힘들었던 건 아무래도 주방 내에서의 학력차이였습니다. 당시 선배들은 기술이 무척 훌륭했으나 고등학교 졸업자도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거든요. 중졸, 국졸이 대다수인 상태에서 대졸자가 오니 주방에서 엄청 튀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지시 받고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 ‘대학을 나와 이런 것도 못하냐?’는 핀잔을 제일 많이 들었죠.”

이유 없이 혼나는 경우도 많았지만 하영철 총주방장은 이를 극복해냈다. 바로 선배들이 하지 못하는 부분을 대신 채우는 역할을 통해서였다. 사내 프레젠테이션이나 TF팀이 구성될 때면 그가 우선적으로 나서게 됐다. 이에 자연스럽게 성격도 변해갔다.

“원래 저는 굉장히 내성적이고 섬세한 성격이었습니다. 남들 앞에서 눈도 잘 못 마주치고 말은 더더욱 하기 힘들었죠. 신입 때 각종 프레젠테이션과 미팅을 하면서, 또 총주방장이 되고 많은 직원들을 관리하다보니 지금처럼 여유가 생긴 것 같습니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셰프들은 굉장히 다혈질인 경우가 많은데, 저는 오히려 조리에 적합한 인재는 내성적인 친구라고 봅니다. 꼼꼼하고 섬세해야 하거든요. 셰프들이 강한 성격으로 비춰지는 건 조리공간의 리더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과 칼을 다루는 일이다보니 사소한 실수에도 신체를 훼손하는 큰 사고로 이어집니다. 주방의 리더가 엄한 건 다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거지요.”

하영철 총주방장이 기억하는 선배는 이철기 셰프다. 말보다 몸이 앞선 선배였지만 이철기 셰프를 통해 새로운 정보와 기술을 많이 배우며 하루하루 성장해 가는 기쁨을 느꼈기 때문이다. 원망과 힘들었던 기억이 옅어진 지금, 총주방장이 되기까지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를 추억케 하는 원동력이다.

30여 년간 워커힐 내 다양한 업장을 다니며 그는 경력을 쌓았다. 그간 새로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업장도 고스란히 기억에 담았다. 하영철 총주방장은 워커힐 최초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오픈을 위해 밀라노 팔래스 호텔에서 연수를 받기도 했다. 좋은 이탈리아 셰프를 영입해 함께 합심하여 외국 관광객도 만족할만한 퀄리티의 음식을 만들며 보람도 느꼈다. 2011년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의 총주방장이 된 그는 가장 기억남는 일로 2012년 G50핵안보정상회의를 꼽았다.

“건국이래 50개국의 수장이 우리나라에 모인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 행사의 지정호텔로 워커힐이 선정되었고, 제가 그분들에게 음식을 직접 선보였다는 사실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하영철 총주방장이 주방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기본’이다. 30여 년간 수많은 업장이 리노베이션과 오픈을 통해 변하거나 생겨났지만 단 한 번도 퓨전음식을 선보인 적이 없었다. 새로운 한식당 온달도 이조시대 양반가 음식을 재현했고, 중식당 금룡도 광동식 정통요리를 테이블에 올린다. 모든 비즈니스가 부침이 있지만 꼿꼿이 자신의 기준을 지켜나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30년을 한결같은 자리에 머문 그의 인내가 ‘기본’이라는 단순한 말의 무게감을 달리한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많은 호텔에서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당시 연봉인상이나 승진은 이직을 통해서 이뤄지는 게 대부분이었지요. 저에게도 여러 유혹이 있었지만 이상하게 저는 워커힐에 대한 애착이 많았습니다. 물론, 장학금때문에 몇 년간 이직할 수 없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건 가벼운 농담이고 실제로 저는 워커힐을 정말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합니다.”

▲ Dark Chocolate Cake, Berry Cream and Strawberry bon bon

첫 직장이 마지막 직장으로 남게 되는 것이 꿈이라는 하영철 총주방장은 자신의 인생을 대표할 수 있는 음식으로 ‘딸기 디저트’를 골랐다. 최근 몇 년간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은 ‘베리 베리 스트로베리’라는 이름으로 호텔업계에 딸기 디저트 뷔페의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이 계절성 이벤트의 시작과 맞물려 선택된 메뉴일거란 의심을 하는 찰나, 하영철 총주방장은 그 마음을 알았는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에는 여덟 개의 식음업장이 있습니다. 매달 하나의 영업장에서 R&D 평가회를 진행하죠. 각 영업장 직원들이 새로운 상품을 만들고 조리장이 다 같이 모여 함께 평가를 하고 의견을 줍니다. 음식에는 창의력이 필요한데 이는 하나의 천재에 의해 짠! 하고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주방 구성원 모두가 수천 번 먹어가며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나의 완벽한 요리로 완성되는 거죠. 평가회를 거쳐 개발한 음식의 완성도를 점점 높여 차곡차곡 쌓아뒀다가 프로모션에 내놓게 됩니다. 이 딸기 디저트 뷔페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요즘은 제철이 겨울이라 인식될 만큼 딸기가 흔하고 쉽게 보는 과일이 됐다. 하지만 몇 년 전만해도 봄이 제철이고 보기 힘든 비싼 과일이었다. 퀄리티도 지금 만큼 높지 않았다. 2008년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은 호텔업계 최초로 딸기 디저트 뷔페를 선보였다. 로비에 2m 상당의 딸기 피라미드를 쌓았고, 다양한 딸기 디저트 메뉴를 선보였다. 차츰차츰 인기를 끌던 딸기 디저트 뷔페는 올해로 9회째를 맞이했고, 이제는 특급호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절 프로모션이 됐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간은 딸기의 퀄리티도 낮고 잘 알려지지 않아 고객수가 적었습니다. 2011년 정도부터 딸기의 품질이 높아지고 겨울철 과일로 자리 잡아가면서 인기를 끌게 됐죠. 그래서 현재는 모든 특급호텔이 딸기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하나의 요리가 아니라 딸기라는 식자재로 호텔업계 트렌드를 창조해낸 것이죠. 이에 대해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절 한정, 거기에 3년간 가시적인 성과가 없음에도 하영철 총주방장은 딸기 디저트 뷔페 성공에 확신이 있었다. 개인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그와 조리구성원을 믿은 회사의 신뢰도 큰 몫을 했다.

“호텔 로비가 다른 곳보다 천고가 높고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겨울의 끝에 거대한 딸기탑을 로비에 쌓아두면 모든 고객들이 그 모습과 향에 이끌려 딸기를 찾게 됩니다. 이는 고객들의 입을 통해 전달이 됐고 외국고객 역시 꾸준히 문의를 해오고 딸기를 구매해가기도 합니다. 농가에 큰 도움까지는 아니겠지만 해외에 우리나라의 훌륭한 딸기를 홍보한 셈이죠.”

다만, 하나의 눈송이는 바닥에 떨어지면 금방 녹아내린다. 여러 눈송이가 서로 뭉쳐야 세상을 덮는다. 하영철 총주방장은 순간이면 사라질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요리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오래토록 남을 워커힐의 상징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많은 후배들을 이끄는 총주방장으로서 가장 멋진 업적이 바로 딸기 디저트 뷔페라고 그는 생각했다. 30년간 변하지 않았던 순백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선택이다.

“지금도 워커힐에서는 꾸준히 새로운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제가 다 한 것처럼 나갈까봐 부담스럽습니다. 모든 구성원이 노력해서 만들어낸 결과니까요. 미디어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고되고 힘든 자리지만 저를 믿고 따르는 후배들이 투철한 직업관을 갖추고 있다면 새로운 아이템이 더 사랑받는 그날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워커힐이 조리 분야에서 꾸준히 다른 호텔을 선도하는 호텔로 남기를 바랍니다.”

프리미엄 외식 산업의 리더, 특급호텔의 미래를 준비하는 ‘Top Chef Summit for Young’
프리미엄 외식 산업의 리더, 특급호텔의 미래를 준비하는 ‘Top Chef Summit for Young’은 28년 연속 가축 질병 제로, 농축산 분야 세계 최초로 유엔이 인증한 지구 온난화 방지 기후협약 실천 친환경 방식으로 생산한 고품질의 프리미엄 돼지고기를 세계 45개국 특급호텔과 고급 레스토랑에 공급하고 있는 칠레 최대의 농축산 기업 ‘아그로수퍼’와 호텔 요리 트렌드의 공유는 물론 한국 식문화와 조리 분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국내 특급호텔 현직 총주방장 모임 ‘셰프테이블’이 후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