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마트에서 장을 보다 ‘조선호텔 김치’를 발견했다. 650g에 7500원. 비싼 가격이지만 덥석 집어 카트에 담았다. 지리산 생수와 국내산 갈치로 만든 ‘특제육수’를 넣었다는 김치는 포장부터 고급스러웠다. 뚜껑을 열고 내부에 있는 밀봉 포일을 찢는 긴장된 순간, 김치는 당당하고 도도하게 말했다. '나는 조선의 김치다'라고……

▲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_수펙스 김치

#며느리놀이

1963년 11월 15일 서울 반도호텔. 조금 산다는 집안 며느리들이 에이프런 차림으로 모였다. 김장 담그기의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서다. 그들 앞에 나타난 수도가정조리학원장 하선정씨는 새우젖과 둥근 파, 계란 흰자를 이용한 맑은 젖국 만들기와 함께 배춧속 고갱이를 적출해 만드는 ‘고갱이짠지’, 개성식 보쌈김치로 김장독을 럭셔리하게 채워 넣는 방법을 전수했다. 고갱이 짠지의 재료는 고갱이 10사발, 갓 1단, 파 10뿌리, 통깨 반 컵, 젖국 2컵, 고추 다진 것 2컵, 소금과 설탕 반 컵씩, 맛난이(MSG?)였다. 그 당시 시집살이는 김치 보다 훨씬 매웠다. 친정 엄마에게 전수받은 김치는 시댁의 입맛과 완전 달랐기 때문이다. 호텔 김치는 자칫 ‘네 맛도 내 맛도’ 아닐 수 있겠지만 상류층 가정에서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모범답안’이었다.
호텔의 한식은 궁중요리가 기반이 된다.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시대를 거쳐 고급 요릿집에서 이어온 김치 담그는 비법 역시 60년대 이후 호텔 한식당에 그대로 전수 됐다. 고객층이 똑같기 때문이다.
50년이 지난 2015년 11월 21일에도 비슷한 풍경은 이어졌다. 장소는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명월관 앞마당. 워커힐 수펙스 김치 연구소 이선희 조리장의 설명을 듣는 참가자 70여 명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다.
워커힐이 진행한 김장 이벤트는 성공적이었다. 김치 속재료 준비하는 법과 속 넣는 법까지 김치 담그기의 전 과정을 경험한 참가자들에게는 거대한 가마솥에서 펄펄 끓여낸 설렁탕과 함께 돼지고기 수육, 김치전이 제공됐다. 소주나 막걸리 대신 여러 가지 과일을 넣고 레드와인을 끓인 뱅쇼 한 잔이 곁들여졌다. 직접 담근 5㎏의 김치도 값졌지만 #호텔 #김치담그는여자 #김장녀 #supexkimchi #며느리놀이 #koreanfood 같은 해시태그는 ‘김장의 추억’에 요즘 세대가 좋아하는 감칠맛을 불어넣었다.
2015년을 살아가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여성들은 ‘ㅇㅈ세대’다. 자신의 행위를 SNS를 통해 어필하고 ㅇㅈ(인정)? 하고 되묻는다. 이들에게 김치를 직접 담그는 행위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힙스터의 새로운 덕목이다. 김치를 통해 나를 내세우고 김치를 통해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다. 거창하게 ‘매슬로우의 욕구단계 이론’을 빌려 설명하면 인간의 욕구 중 마지막 단계인 ‘존경‘과 ‘자아실현‘이 김치 한 포기에 담겨져 숙성된다.

▲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_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의 모습

#6성급아삭함

호텔에서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야가 한식이다. 손님들 모두가 ‘집밥’이라는 수십 년 쌓아온 기준점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 바로 ‘김치’다. 우리나라 국민을 대략 4인 가족으로 묶으면 1000만 가구다. 지금은 김치를 직접 담그지 않는 가정도 많지만 ‘엄마김치’에 대한 기억들은 뚜렷하다. 여전히 김치에 대한 1000만 가지 기준이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온갖 타박을 받고 아무리 잘해봐야 결국 식탁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비운의 메뉴가 바로 김치다.
호텔이 추구하는 김치의 맛은 ‘군내 없는 숙성’과 ‘아삭함’을 추구하는 것이 공통점이다. 김치냉장고가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 손님들은 사시사철 ‘김장독에서 갓 꺼낸 아삭한 맛’을 원했다. 전라도 김치는 숙성과정에서 생기는 '군내'를 잡기 어렵기 때문에 호텔 김치에서는 보기 어렵다. 개성식과 서울·
경기도식을 혼합한 깔끔하고 가벼운 스타일이 호텔 김치의 대세를 이루게 된 이유다.

▲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_수펙스 김치

#인간이만드는최고의김치

“그래봤자 김치일 뿐인데”라고 누군가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남다른 철학을 넣고 담근 김치라니, 멋지다. 직접 먹어보면 아삭아삭 기가 막히다. 워커힐 수펙스 김치는 SK그룹에서 말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인 SUPEX, 즉 ‘Super Excellent 수준’을 목표로 하는 김치다.

▲ 워커힐 수펙스 김치 연구소

수펙스 김치의 역사는 SK 그룹 선대 최종현 회장의 지시에 따라 1989년, 호텔 최초로 호텔 내에 김치 연구실을 개설하며 시작됐다. 그 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김치의 맛과 영양을 연구해, 26년이 지난 지금은 더욱 깊은 맛으로 숙성됐다. 워커힐은 김치 전용 숙성실에서 알맞은 발효와 숙성 기간을 거쳐 최상의 김치맛을 유지하는데 불순물을 제거할 수 있는 전통 항아리 숙성법을 채택했다. 발효 기간 동안 항아리의 기공을 통해 불순물을 밀어내 장기간 신선하게 저장이 가능하다. 종류는 갓김치, 나박물김치, 백김치, 배추김치, 열무김치, 열무물김치, 총각무김치, 파김치, 오이소박이, 깍두기 등 약 10종이 있다. 115만2000원을 내면 월 2회, 2㎏씩(500g 배추김치 3팩+500g 기타김치 1팩) 총 48㎏의 김치를 1년간 배송해준다. 6개월은 57만6000원(세금포함)이다.
이선희 조리장이 명월관 앞마당 체험행사에서 설명한 수펙스 김치는 “시원하고 화려한 맛”이다. 조선후기 서울 경기도 김치를 기본으로 이북의 영향도 받았다. 절이는 과정부터 세심하게 진행되는데 본격적인 양념을 넣는 과정에는 곱고 밝은 색 고춧가루가 포인트다. 영광 천일염에 찹쌀죽, 광천 새우젖을 넣고 다진 민물새우를 넣어 시원한 맛을 더한다. 밸런스를 맞추는 용도로 설탕을 넣고 양지 육수를 붓고 배를 썰어 넣는다. 마늘과 생강은 3:0.8 비율로 넣는다.
수펙스 명품 김치는 이선희 조리장이 이끄는 김치 연구소에서 만든다. 그는 1989년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조리팀에 입사한 26년차 호텔리어며, 혜전대학교와 수원여자대학에서 발효 및 저장음식에 관하여 강의 중인 교수님이다.

#단아한신라김치

신라호텔 역시 김치맛은 예전부터 알아줬다. 제주 신라호텔은 호텔에서 사용하는 김치를 직접 담그는데 2000년대 중반에는 '제주 한라산 김치'라는 브랜드로 일반에 판매도 했다.
서울 신라호텔 한식당 '라연'은 두 가지 김치를 직접 담근다. 더덕김치와 배 보쌈김치다. 더덕김치는 부드럽고 연한 배추의 중간 부분(속대)에 절여내고, 제철을 맞은 무, 감, 더덕 등을 정갈하게 채 썰어 절인 배추에 놓고 말아낸다. 2~3일 주기로 담아 숙성을 시켜 제공함으로써, 항상 동일한 맛을 유지 하는 것이 특징이며 식자재가 가진 단맛과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일품이다.

▲ 서울 웨스틴조선호텔_ 김치

#내가조선의김치

내가 이마트에서 만났던 김치는 사실 ‘조선호텔 맛 김치’였다. 조선호텔이 감수를 했지만 제조는 다른 곳에서 진행된 일종의 ‘콜라보레이션’ 상품인 셈이다. 그래도 분명 ‘호텔의 맛’이 났다. 진짜 ‘조선의 김치’는 호텔과 백화점, SSG마켓 청담점 등 제한된 채널에서만 판매한다. 진짜 명품은 대량생산이 어렵기 때문이다.
조선호텔 김치는 맵고 짜지 않은데 있다. 젓갈만으로 간을 했지만 젓갈 냄새가 나지 않는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다. 23℃에서 배추를 손질한 후 건염이 아닌 염수 7%로 일정하게 유지하며 5℃의 냉장고에서 하루 동안 절였다가 사용하는 것이 아삭아삭한 맛을 더해준다. 가다랑어 국물에 찹쌀 풀을 넣고 양파, 무즙, 과일즙으로 단맛을 더해 시원하고 깔끔한 맛을 낸다. 2002년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한식당에서 고객들에게 질 좋은 김치를 제공하기 위해 조선호텔 김치가 처음 선보였는데, 깔끔한 맛으로 호응을 얻어 2003년 신세계 백화점 내에서 일반 판매를 시작했다.
조선호텔 김치는 순수 국내산 고급 원재료만을 사용한다. 가장 중요한 배추는 겨울엔 해남, 여름엔 강원도 고랭지, 봄과 가을엔 충남 해미의 배추를 구해다 쓴다. 양념은 서해안 까나리 액젓, 경북 영양의 세절 청결 태양초 고춧가루 등 국내산 최고급 재료들로만 준비하고 있다. 천연 재료로 만든 조선호텔 특제의 양념은 재료의 맛을 충분히 살려주며, 완전 숙성된 후에도 군내나 쓴 맛이 나지 않아 깔끔하고 개운한 뒷맛을 가진다.
배추김치 외에도 김치 10종류 이상에 HACCP 인증을 획득해 과학적이고 위생적인 시스템을 구비했다. 김치 상품권(10만 원, 50만 원, 100만 원)도 판매한다.

▲ 메이필드호텔_ 봉래헌 김치

#김장독에묻힌추억

메이필드 호텔은 김치맛 하나는 ‘6성급’이다. 서울 시내 특급호텔 가운데 유일하게 두 개의 한식당을 운영할 정도로 한식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기에 한정식당 ‘봉래헌’과 한식당 ‘낙원’ 등 호텔 내 손님상에 올리는 모든 김치를 경력 25년 최금덕 조리장의 진두지휘로 사계절 내내 직접 담근다.
봄에는 쑥부쟁이물김치와 더덕물김치, 여름에는 오이물김치, 가을에는 순무물김치와 홍시를 넣어 담근 배추김치, 겨울에는 인삼 물김치와 생새우를 넣은 포기김치 등 제철 식재료를 사용한 김치를 비롯해서 총각김치, 석박지, 동치미, 파김치, 갓김치 등 직접 담그는 김치의 종류만 해도 20가지가 넘는다.
특히 겨울에는 충남 예산의 직영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유기농 배추와 1등급 태양초, 3년 이상 묵혀 간수를 뺀 천일염, 배, 양파 등 천연 재료로만 맛을 낸 800포기의 김장김치를 담근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봉래헌 뒤뜰에 장독을 묻어 김치를 보관했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온의 상승 등을 이유로 현재는 김치 냉장고에 보관하지만 그 맛은 여전하다.

#글로벌김치

김치를 사먹는 것이 낯설었던 시절, 김치공장에서 가장 비싼 김치를 사가던 고객은 글로벌 브랜드의 체인호텔이었다. ‘현지화’를 강조하는 글로벌 체인들의 전략은 뷔페 레스토랑에 선보이는 김치의 종류에서 잘 드러난다. JW 메리어트 서울, 그랜드 하얏트 서울 등의 뷔페레스토랑에는 로컬 브랜드 호텔에 비해 월등히 많은 종류의 김치가 준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 포시즌스 호텔 서울_ 김치

최근에는 김치를 직접 담그는 호텔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홈메이드’가 ‘럭셔리’라는 등식 때문이다. 포시즌스 호텔 서울은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은 홈메이드 김치를 직접 만들어 제공한다. 공장을 통해 대량 생산하는 방식이 아닌, 김치 전문가(Kimchi Specialist)가 일주일에 두 번씩 호텔에 방문해 딱 일주일치 김치만을 생산한다. 포시즌스 관계자는 “한국의 훌륭한 전통 음식인 김치를 최대한 많이 체험하길 바라기 때문에 오래 숙성시킨 김치를 어려워하는 외국인들도 쉽게 맛볼 수 있도록 보관 기간이 오래되지 않은 김치를 내놓고 있다”라고 일주일치를 만드는 이유를 설명했다.
포시즌스의 김치는 경상도 스타일이다. 영천 고추가루, 포항 멸치액젓, 강원도 고랭지 배추 등 각 지역 특산물을 재료로 사용하며 배추김치, 백김치, 오이김치, 파김치, 총각김치, 깍두기 등이 준비된다. 다른 식재료와 냄새가 혼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김치만 보관하는 냉장고에 따로 보관하며, 온도는 영상 1~2도로 유지시킨다. 포시즌스 서울은 앞으로 고추장과 된장도 직접 담글 예정이다.
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 역시 최근 김치를 직접 담그기 시작했다. 이 호텔은 ‘돔페리뇽 빙수’ 등 럭셔리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식음 프로모션이 유독 많은 편인데, 뷔페 레스토랑 타볼로 24가 자랑하는 한식 섹션에서 ‘트러플을 다져 넣은 깍두기’, ‘캐비어와 엔초비로 숙성시킨 김치’ 등 남다른 김치를 만날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_ 전경우 스포츠월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