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우리 마음속의 축제다. _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쩜, 파리를 이렇게나 훌륭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역시 헤밍웨이다.

위의 인용은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2011) 주인공 길 펜더(오웬 윌슨)의 대사 중에 나오는 말이다.

20세기의 거장 영화감독들 중 지금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굴까. 나는 우디 앨런이라고 확신한다. 많은 거장 감독들이 이미 죽거나 이제는 창작열이 소진되어 잊혀 진 반면, 1935년생으로 올해 만 여든인 이 노장 감독은 지금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게다가 작년에는 존 터투로 감독의 「지골로 인 뉴욕」에 오랜만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고백컨대 내가 영화에 무한한 애정을 갖게 된 것도 우디 앨런의 영향이 크다. 그의 걸작들, 「브로드웨이를 쏴라」나 「맨하탄 머더 미스테리」, 「마이티 아프로디테」나 「모두가 사랑한다고 말하지[Everyone says I love you]」와 같은 영화들을 보며 나는 미국, 특히 뉴욕에 대한 환상을 품었다. 브룩클린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극심한 고소공포증 때문에 비행기를 탈 수 없어 뉴욕에 관한 영화만 만들던 이 뼛속까지 뉴요커인 사람이, I♡NY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파리로 건너가 찍은 「미드나잇 인 파리」는 관객과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우디 앨런 감독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잘 나가는 할리우드 대본작가인 길 펜더(오웬 윌슨)는 약혼자 이네즈(레이첼 맥아담스)와 함께 파리로 여행을 와 있다. 그는 상업적인 영화대본작가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순수소설을 써 보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파리의 화려함만을 쫒는 약혼자에 질려 혼자 밤거리를 산책하던 그는, 자정의 종이 울리자 마법같이 1920년대의 파리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그가 그토록 찬미하던 1920년대의 예술가들,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 콜 포터,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등을 만난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예술가들 중에서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도 그럴 것이, 헤밍웨이만큼 파리를 사랑한 작가도 드무니까.

헤밍웨이는 호텔을 사랑했다. 정확히는 방랑을 사랑했다. 그는 미국인이지만 고교 졸업 후인 18세 이후로(헤밍웨이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생애의 대부분을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보냈다. 수준급 권투선수였으며, 기분이 울적하면 아프리카로 날아가 사자 사냥을 즐기던 이 상남자 로맨티스트 방랑가가 그래도 오래 머무른 곳을 든다면, 프랑스의 파리와 쿠바의 아바나다. 그리고 파리와 아바나에는 지금도 헤밍웨이를 사랑하는 호텔들이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 등장하는 여러 예술가의 공통점은, 다들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콜 포터 등은 미국인이고, 피카소와 달리는 스페인 사람이다. 1920년대의 파리는 전 세계의 예술가(와 예술가 지망생)들을 끌어들이던 매혹의 도시였다. 이 시절 헤밍웨이는 자신의 30대 대부분을 파리에서 보냈다. 당시 그는 이미 전 세계적인 유명 인사였다. 1926년 출간한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로 그는 미국보다는 유럽에서 이미 스타작가가 되었다. TV는 발명되지도 않았고 라디오가 이제 막 보급되던 그 시절에,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와 같은 소설가는 요즘 말로 월드스타급 인기를 누렸다. 유럽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함께 술잔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그런 월드스타가 자주 들러 혼자 조용히 앉아 글을 쓰고 술잔을 기울이던 곳은 파리의 리츠 호텔 구석진 곳에 숨겨진 조그만 바였다.

코코 샤넬이 30년 동안 살았고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죽기 직전 머물렀던, 옛 프랑스 왕궁을 개조해 만든 이 특급 호텔의 바는 생각보다 작고 아담하다(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도 이 바의 모습을 잠깐 볼 수 있다). 헤밍웨이가 파리를 떠나고 난 뒤 리츠 호텔은 그를 추억하며 바의 이름을 ‘헤밍웨이 바’로 바꾸었다. 내가 이 바를 찾아갔던 2008년에는 메뉴판에 ‘헤밍웨이 위스키’라는 이름의 칵테일도 있었고, 바 곳곳이 헤밍웨이의 책과 유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리츠 호텔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호텔 전체를 리노베이션했는데, 2015년 현재의 헤밍웨이 바는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리츠 호텔 말고도 파리에는 헤밍웨이의 이름을 사용하는 호텔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파리 메리어트 호텔. 이 호텔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이름은 ‘헤밍웨이 룸’이다. 헤밍웨이가 이 방에 자주 머물렀기 때문. 파리 리츠 호텔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이 ‘코코 샤넬 스위트룸’인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발자취가 마케팅의 도구로 사용되는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불같은 성격의 헤밍웨이는 또 뭐라고 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1929년 아버지의 권총 자살 소식을 듣고 헤밍웨이는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향한다. 그리고 3년 뒤인 1932년 헤밍웨이는 다시 쿠바의 아바나로 떠난다. 그는 1932년부터 1939년까지 7년간, 아바나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 머물면서 소설을 집필했다. 이 호텔 511호실과 쿠바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 최남단 키웨스트의 별장에 번갈아 머물면서, 헤밍웨이는 「킬리만자로의 눈」이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와 같은 소설을 써 냈다. 암보스 문도스 호텔은 ‘헤밍웨이 호텔’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가 머물렀던 511호실은 지금은 객실이 아니라 작은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개장해 입장료를 받고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문명에 환멸을 느낀 헤밍웨이는 주로 아프리카에 머물렀는데, 덕분에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는 아예 이름이 ‘헤밍웨이 나이로비’인 호텔도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아프리카에서 두 번의 비행기 추락 사고를 겪었고, 이후 신병 치료를 위해 다시 쿠바 아바나로 돌아온다.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서의 추억이 그를 다시 아바나로 오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헤밍웨이는 이후 10년 넘게 쿠바에 머물며 아바나를 자신의 ‘제2의 고향’이라고 불렀고,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노인과 바다」는 아바나에 머물면서 집필한 것이다. 그러나 쿠바를 사랑하고 또 쿠바인들이 사랑했던 미국인 작가 헤밍웨이는, 1959년 쿠바 혁명정부에 의해 영구 추방당하고 만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61년,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가까운 아이다호州의 케첨에서 엽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 위스키에 취해 엽총을 오발한 사고라고도 하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자살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자신의 머리를 겨눈 엽총의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헤밍웨이 눈에는 무엇이 보였을까. 그가 사랑했던 파리와 아바나의 호텔들은 아니었을까? 덕분에 파리와 아바나를 비롯한 세계 여러 곳에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기리는 호텔들이 남아 있다.

_ 배호남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