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1급 호텔과 럭셔리 호텔은 다르다. 이제는 흔해빠진 특1급 호텔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객실과 로비, 레스토랑, 연회장, 주차장 등 이른바 ‘스펙’만 맞추면 된다. 하지만 고객에게 ‘럭셔리 브랜드’로 인정받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패션, 시계, 자동차 등 다양한 산업군에서 럭셔리급으로 인정받는 브랜드들의 공통점은 디테일과 완성도, 고집과 열정이다. 이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서도 거의 병적인 수준으로 브랜드 콘셉트와 높은 퀄리티를 유지하려 애쓴다.

퍼블릭 공간에 위치한 화장실은 호텔이 특별히 내세울 공간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고객이 호텔의 품격을 실감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예전에는 좋은 집에 가면 ‘호텔 같다’는 표현을 썼지만 특급호텔 기본 사이즈 객실보다 훌륭하게 꾸며진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객실이 주는 만족도가 점차 떨어지고 있다.

호텔이 자랑하던 대리석 깔린 화려한 로비 역시 마찬가지다. 요즘은 구청 건물만 봐도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고 대기업이 소유한 건물들 역시 감각적인 인테리어에 고가의 미술품으로 도배를 해놓은 곳이 많다. 호텔에 들어선 순간 느끼던 감흥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도 호텔에는 아직까지 ‘넘사벽’인 공간으로 화장실이 남아있다.

화장실을 만드는데 필수 요소는 변기, 세면대, 거울이다. 바닥과 벽의 마감재와 조명도 필요하고 ‘큐비클’이라 통칭하는 문이 달린 부스 형태의 칸막이도 필요하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건물은 외관과 로비, 엘리베이터 정도에는 많은 투자를 하지만 화장실에서는 원가절감에 힘쓴다. 그룹 본사가 입주해 있거나 임대업이 본연의 목적인 인테리전트 빌딩 정도가 유명 브랜드 제품 변기와 수도꼭지를 시공해 놓는다. 화장실이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 탓인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이름을 ‘화장실’이라고 애매모호하게 붙였을까.(본질적인 기능으로 따지면 ‘변소’가 딱 맞는다)

반면, 특1급 호텔 중 럭셔리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호텔들은 화장실에도 선뜻 거금을 쓴다. 전체적인 인테리어 콘셉트를 그대로 반영한 디자인이 화장실 전체에 녹아 있고 당연히 변기와 수전류는 최고급이다. 큐비클 역시 기성품이 아닌 디자인에 맞춰 별도로 주문해 가격은 몇 배로 뛴다. 일반 건물 화장실에서 볼 수 없는 핸드타월을 비치해 사소한 부분까지 ‘우리호텔을 찾는 손님들은 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용적인 측면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은 인건비다. 화장실을 전담해 관리하는 인력에 들어가는 비용을 쓰지 않고서는 항상 뽀송하고 쾌적한 화장실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과 투자가 이뤄진 호텔의 화장실은 호텔이 제공하는 ‘이상적인 주거’의 경험을 고객에게 선물한다. 로비에 감돌던 호텔 특유의 고급스럽고 기분 좋은 공기를 화장실에서도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퍼블릭 공간에 있는 호텔 화장실은 사회적인 광장의 기능과 개인적 공간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가 있는 곳은 일시적으로 만인에게 수평적인 공간이 된다. 정재계 모임이 늘 있는 롯데, 조선, 신라 등 호텔 로비 화장실에서는 유명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도 가능하다. 아무리 VVIP라도 차량을 타고 이동 중 급박한 상황에 몰리면 로비에 있는 화장실로 뛰어가는 것 이외에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이들에게 아는 척을 하거나 사인을 요청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 사람은 없다)

여자화장실은 조금 다르다. 핵심 기능을 하는 공간은 모두 부스 형태로 막혀져 있기 때문이다. 대신 세면대쪽 거울 앞에서 여자들은 ‘사회생활’을 한다. 여자들은 이 지점에서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만 각자 다른 의도가 담긴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눈다. 드라마에서도 이런 장면은 자주 등장하는데 남의 험담을 하는 경우 닫힌 부스 안에서 물을 내리는 소리가 나며 장면이 바뀐다.(꼭 그 안에는 뒷담화의 당사자가 있기 마련이다)

▲ W Seoul Walkerhill, Unisex WC

우리나라에서 화장실의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기능을 가장 명확하게 해석해 보여주는 곳은 W 서울 워커힐이다.

W 호텔 월드와이드는 화장실을 ‘WC’라고 명명한다. W만의 별칭을 붙이기를 좋아하는 문화 중 하나다. W 서울 워커힐의 로비는 ‘리빙룸’으로 불리며, 리빙룸에서 레스토랑 ‘키친’으로 통하는 화장실은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를 위해 설계됐다. 남녀공용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이한데 가정집의 거실에는 남녀 화장실이 구분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빨간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간 화장실 내부는 코쿤 형태로 되어 있다. 넓고 아늑하다. 개인용 모니터에는 W 호텔 월드와이드의 해프닝 비디오가 상영되고 W 특유의 화이트 & 레드톤으로 꾸며져 있어 집안의 화장실 같은 안락함을 준다.

▲ W Seoul Walkerhill, WC

반대쪽 우바와 프런트가 있는 공간 뒤에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화장실이 있다. 호텔 내 W 더 스토어 & 위시스에서 연결되는 이 화장실은 남녀가 구분되어 있다. 여자 화장실은 관능적인 붉은빛 조명으로 가득하다. 한쪽 벽면은 대형거울이 차지하고 있어 그 조명이 2배로 전달되며, 스타일링 체크에도 유용하다. 인스타그램을 검색하면 이 멋진 화장실을 배경으로 촬영된 셀카가 끝도 없이 쏟아진다.

▲ W Seoul Walkerhill, WC

바로 옆 남자 화장실은 미래적인 느낌을 주는 푸른빛이다. 소변기 대신 물이 흐르는 벽을 설치해 개방성을 강조했고, 남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게 되는 눈높이에는 비디오 아트가 상영되어 자연스러운 시선 처리를 돕는다.

▲ W Bangkok, WOOBAR WC

W 호텔은 해당 지역의 정체성을 화장실에 반영하기도 한다. 발리에 있는 ‘W 리트릿 앤 스파 발리 - 세미냑’ 내 ‘Fire’ 레스토랑에 있는 화장실은 화산을 모티브로 하는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이 화장실에서는 바닥에 있는 버튼을 밟아 화산모양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이용해야한다.

W 방콕의 화장실은 특별한 향기와 보랏빛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이다. 샴 고양이 모양의 조각품이 스스로 빛을 반사시켜 사방에 빛을 퍼뜨린다. 태국의 전통 건축 기법을 응용해 반사되는 물질로 만들어진 화장실 벽의 모자이크 타일은 환상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특별한 느낌의 화장실을 원한다면 서울 신라호텔 최상층 이그제큐티브 라운지 남자화장실을 추천한다. 지난 2013년 레노베이션과 함께 만들어진 이 화장실은 코너에 위치해 양면이 통유리로 되어있는 전면에 남자용 소변기를 배치해 탁월한 전망을 내려다보는 만족감이 남다르다.

가장 높은 화장실을 원한다면 콘래드 37층으로 올라가보자. 호텔 최상층인 37층에 위치한 이 화장실은 같은 층에 위치한 37그릴 앤 바와 이그제큐티브 라운지 인테리어에 사용된 우드컬러와 대리석을 사용해 럭셔리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통유리를 만들어 낮에는 자연채광을 받을 수 있도록 했고 밤에는 고객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블라인드가 내려진다. 층고가 높아 탁 트인 느낌을 주고 평범함을 탈피하기 위해 안이 깊게 파인 드럼 형태의 세면대를 사용한 점도 재미있다. 공동으로 이용하는 공간이 아닌 딱 1명만 들어가는 개별적 공간을 남녀 각각 2실씩 구분해 잠시라도 완벽한 혼자만의 공간을 서비스 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콘래드는 프런트를 지나 로비 1층 끝에 위치한 화장실도 1명만 들어가는 형식으로 운영 중이다.

인테리어의 연속성을 가장 잘 지키고 있는 곳 중 하나는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이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디자이너로 꼽힌 바 있는 아담 티아니(Adam D. Tihany)가 참여한 레노베이션 작업 이후 크게 달라진 호텔의 모습은 로비와 레스토랑, 연회장 인근 여러 곳에 있는 화장실까지 이어지며 브라운 & 베이지 톤의 아늑한 느낌을 유지한다.

공간을 유기적으로 묶어주는 역할은 시각적인 인테리어 이외에도 후각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의 화장실은 스파의 테라피룸과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두운 조명 너머로 스파에서 사용하는 에센셜 오일의 향기가 온 몸을 휘감는다.

▲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의 오일버너

오일버너는 반얀트리 호텔만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아이템이다. 실제로 전 세계 반얀트리 호텔과 리조트에 체크인하는 모든 고객의 방과 공공 화장실에는 에센셜 오일이 들어간 오일버너가 기본적으로 셋팅이 된다. 오일버너는 자연스럽게 향이 퍼져나가도록 해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심신 안정에 도움을 준다. 오일버너에는 요일별로 정해진 에센셜 오일을 3, 4방울 떨어뜨려 사용한다. 월요일은 레몬그라스(Lemongrass), 화요일은 오렌지(Orange), 수요일은 페퍼민트(Peppermint), 목요일은 시트로넬라(Citronella), 금요일은 유칼립투스(Eucalyptus), 토요일은 리치아 쿠베바(Litsea cubeba), 일요일은 파인(Pine) 순서다.

W 호텔에서도 바닐라 향이 블렌딩된 프라이멀 가디스(Primal Goddess)향을 디퓨저로 사용한다. 기분전환은 물론, 호텔의 여러 공간을 유기적으로 묶어주는 역할도 한다.

#개인적으로 애정을 갖는 화장실은 롯데호텔 서울 본관 지하 1층에 있다. 블랙 & 화이트의 모던한 외관은 마치 샤넬 매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고급스럽다. 웬만하면 붐비지 않는 절묘한 위치에 있으며 모든 부스에 비데가 설치된 것도 특별하다._ 전경우 스포츠월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