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객실 카드키를 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인근 편의점에서 간단한 물품을 사고 돌아오는 길이라 휴대폰도 들고 오지 않았다. 카드키가 없으면 객실층까지 올라갈 수 없으니 방도가 없었다. 하릴없이 서성이며 로비를 두리번거리자 보라색 유니폼을 입은 호텔 직원이 다가왔다. 20층 투숙객이라고 말하자 직원은 아무 의심 없이 엘리베이터로 가 20층 버튼을 눌러주었다. 이런저런 것들을 확인하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

‘더 플라자’라고 이름을 바꾼 지 얼마나 되었나? 일 년? 대개는 '프라자 호텔'이 더 익숙하다. 아래 받침 발음이 어려운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호텔이어서 그랬을까. 그러고 보니 할머니도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조인아, 조인아. 할머니는 어려서 일본에서 자랐다.

1960년 10월 개관한 더 플라자는 한화와 일본 마루베니 호텔의 합작으로 건설됐다. 더 플라자는 조선시대 하늘을 가르는 절이란 의미의 ‘지천사’가 있던 자리다. 태종 8년에는 태평관가 가까워 중국 사신의 수행원 숙박소로 이용된 곳이다. 덕수궁과 경복궁, 정동, 광화문, 명동이 인접하고 서울시청과 광장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참 오랜 시간 역사의 흔적을 묵묵히 지켜온 자리라고 할 수 있다.

할머니는 프라자 호텔 지하의 아케이드에서 작은 매장을 운영했다. 남대문 시장에서 장식품과 공예품, 의류 등을 구매해 호텔을 찾은 일본 관광객에게 판매했다. 깔끔하게 디스플레이 해놓은 물건은 시장에 있을 때보다 몇 배나 비싸보였고, 비싸게 팔렸다. 아마 할머니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이 관광객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쇼윈도에 비친 전통 혼례복을 입은 신랑각시인형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할머니의 가게에 놀러가는 날이면 나는 늘 신이 났다. 그곳에 가면 마감 직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조각 케이크 같은 달콤한 것들을 먹을 수 있었다. 아케이드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가면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카펫이 깔린 호텔 로비가 나왔다. 적당히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서 나는 광장에서 스케이트 타는 아이처럼 놀 수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몇 번이나 타고 다녀도 호텔 직원은 뛰는 것만 제지했을 뿐, 그곳은 그 누구도 나를 혼내지 않고, 모두가 상냥하게 대해줬다. 주로 젊은 여성들이 나와 잘 놀아주곤 했는데 어떤 말을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여성은 어느 나라 사람이었을까. 나에게 ‘프라자 호텔’은 달콤한 조각 케이크와 재미난 에스컬레이터가 있던 놀이동산이었다.

호텔 리노베이션이 진행되면서 할머니처럼 매장을 운영하던 사람들은 인근 지하상가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케이드에서 로비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도 없어졌다. 더 플라자는 1994년, 2010년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진행했다. 특히 2010년 리노베이션은 호텔 업계 최초로 전관 클로징으로 공사가 이뤄졌다. 이후 더 플라자는 인근 호텔과 달리 럭셔리 부티크를 표방하며 감각적인 색상의 객실을 선보였다. 밀라노의 더 그레이 호텔과 베니스의 센트리온 호텔을 디자인한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 인테리어 디자이너 귀도 치옴피가 객실 내 소품과 마감재에 이르는 모든 인테리어를 담당했다.

더 플라자는 2010년 리노베이션을 하면서 라운지 컴필리에이션 앨범 ‘THE PLAZA Boutique Sound STAY'를 디지털 싱글로 발매했다. 원곡과 피아노 연주, 하우스리믹스 버전 세 곡으로 이뤄졌는데 무려 프리템포(Free TEMPO)가 작업했다. 젊은 감각의 호텔로 거듭나려는 당시 더 플라자의 의지를 알 수 있는 상징이다.

어느덧 엘리베이터가 20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객실로 향했다. 복도를 따라 걸으니, 등 뒤로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객실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동행인이 문을 열 때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려 인기척을 확인했다. 보라색 유니폼의 끝자락이 시야에 잠시 들어왔다 사라졌다. 그럼 그렇지. 나는 안심하며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