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쉐라톤 서울 팔래스 강남

쉐라톤 서울 팔래스 강남. 인터내셔널 체인 호텔로 거듭난 반포 팔래스 호텔에서 점심을 먹었다. 최근 전면 개보수를 마친 호텔은 새 것 같았다. 유니폼, 간판, 명함 모든 것을 바꿨다. 그런데 일식당 이름은 여전히 ‘다봉’이다. 바뀌었지만 바꾸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강남의 특급 호텔은 보수적인 느낌이 강했다. ‘강남특별시’에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 매출의 상당부분을 커버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팔래스 호텔 바로 뒤에 살고 있는 허정무 감독은 거의 모든 미디어 인터뷰를 이 호텔에서 한다. 강남사람들은 멀리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소비 시설이 돈을 따라서 집 근처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강남 시계는 느릿느릿 돌아가지만은 않는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고 부정맥 환자처럼 일정한 흐름 대신 불규칙하게 들썩이는 중이다.

서울 호텔가의 ‘메이저리그’는 강북이다. 강남권 호텔에 근무한다면 발끈 할 수 있겠지만 서울이라는 도시가 원래 그런 거다. 조선 왕조 이후로 서울의 중심은 여전히 경복궁 언저리다. 청와대는 여전히 북악산 자락에 있고 정부기관, 대사관, 대기업 본사 및 주요 계열사는 여전히 강북 도심에 가장 많다. 롯데, 신라, 조선 등 로컬 호텔 강자들은 모두 강북을 기반으로 성장했고, 그랜드 하얏트 서울, 밀레니엄 서울힐튼 등 유수의 체인호텔들도 강북에 둥지를 틀었다.
강남에 호텔다운 호텔이 생긴 것은 80년대 고도성장기 무렵이다. 돈이 모이니 사람이 모였다. 그리고 호텔이 들어섰다.

▲ 임피리얼 팰리스 서울

일단 옛날이야기부터 해보자. 호텔의 불모지에 가까웠던 강남에서 팔래스 호텔은 오랫동안 맹주 역할을 했다. 1982년 6월 30일 개관한 반포동 528번지, 서울 팔래스 호텔은 개관 당시 12층 건물에 객실 320실, 뷔페 레스토랑 로만티카, 스테이크하우스 엘파소, 일식당 다봉과 중식당 서궁을 비롯해 나이트클럽, 사우나, 헬스클럽, 게임룸, 스카이가든 등의 부대시설을 갖춰 강북의 유수 호텔과 경쟁을 시작했다.
그 이후 스토리는 어느 분야나 그렇듯 88서울올림픽 이후다.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이 88년 7월,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가 같은 해 8월 599개의 객실을 갖추고 개관했고, 1989년에는 역삼동에 아미가 호텔(現 임피리얼 팰리스 서울)이 들어섰다. 대량의 공급은 결국 수요를 만들었다. 시장은 요동치기 시작했고 강북의 터줏대감들은 예전처럼 배짱 튕기며 장사할 수 없었다. 1991년 9월 3일 연합통신은 ‘江南성장 따라 도심 특급호텔 영업부진’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낸다. 새 것은 좋은 법이다. 룸 컨디션의 우위를 이용한 강남권 호텔들은 무섭게 시장을 잠식해 들어왔다. 당시 서울 도심은 시위가 극심했고, 일부 외국인들은 시위가 신변안전을 우려해 외곽의 호텔로 몸을 피했다. 부유층의 주거지가 강남으로 바뀌며 주말 도심권의 공동화현상은 심해졌지만 강남권 호텔들은 가족단위 손님들이 올려주는 식음매출을 알토란같이 챙겼다. 딱 중간에 위치한 그랜드 하얏트 서울과 서울 신라호텔은 강남시대의 혜택을 받아 챙겼지만, 강북 도심권 호텔들은 비상이 걸렸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탄탄한 조직력을 앞세워 판촉 드라이브를 걸어왔다. 그때 시작된 전쟁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이다.

▲ 리츠칼튼 서울

강남 호텔가의 팽창은 90년대 내내 계속됐다. 1993년 9월 332개 객실을 갖춘 노보텔 앰배서더 서울 강남이 문을 열었고, 1995년에는 바로 옆 남서울 관광호텔이 370개 객실을 갖춘 특1급 리츠칼튼 호텔로 변신했다. 1999년에는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가 최첨단 IT호텔 이미지를 내세워 문을 열었다. 이 같은 폭풍성장은 2000년 반포 고속버스터미널 옆 JW 메리어트 호텔 서울이 497개 객실 규모로 개장할 때까지 계속됐다. JW 메리어트 호텔 서울은 피트니스센터와 스파에 많은 공을 들였고 강남 부자들은 이에 호응해 상당한 회원을 끌어 모았다.

▲ 파크 하얏트 서울

2001년은 아쉬운 해였다. 현대산업개발은 역삼동 스타타워 30~45층에 300실 규모의 호텔 오픈을 위해 파크 하얏트, 포시즌스 등 여러 브랜드와 접촉했지만 2001년 3월 21일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 세상을 떠나며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정주영 회장은 삼성가의 신라호텔, LG가의 인터컨티넨탈 호텔보다 월등하게 호화로운 호텔을 원했지만 결국 보지 못했다. 현대산업개발이 오너인 파크 하얏트 서울은 왕회장의 동생 정세영 회장의 아들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이 삼성동으로 장소를 옮겨 2005년 4월 15일 문을 열었지만 당초 계획보다는 크게 축소된 형태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또 10년이 흘렀다.

강남 호텔들에게 시련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조금 먼 지역에서 나타난 강력한 경쟁자들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2004년 8월 20일 오픈한 W 서울 워커힐은 ‘젊은 호텔’이라는 이미지를 리츠칼튼 서울 등 강남권 호텔들에게서 순식간에 가져가 버렸다. 2010년 6월 타워호텔을 개보수해 오픈한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은 피트니스 회원들에게 전례 없는 혜택을 제시했다. 강남 호텔들이 보유하고 있던 회원 상당수가 이탈했고, 중요한 이너서클들이 통째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F&B 역시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청담동과 가로수길에 들어서기 시작한 고급 레스토랑들은 호텔 레스토랑에 치명타를 안겼다. 강남은 원래 여의도처럼 ‘섬’같은 곳이었다. 집주변에서 쇼핑을 하고 밥을 먹고 돌잔치를 하던 강남 아줌마들은 인터넷과 SNS가 발달한 이후 타 지역으로 ‘점프’하기 시작했다.
객실매출에도 빨간불이 자주 켜졌다. 글로벌 기업들이 해외출장을 줄이고 원격회의를 늘리는 추세가 이어지며 주력 고객층이 흔들린 부분이 가장 심각했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일본인 관광객 수요를 대체할 시장으로 중국이 떠올랐지만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었다. OTA 의존도가 높아지며 떨어지기 시작한 수익률은 악순환에 기름을 부었다.

▲ 신라스테이 역삼

비즈니스호텔, 라이프스타일 호텔을 표방한 중소형 호텔 역시 위협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아코르 계열 이비스와 머큐어가 강남에 들어왔고, 신라스테이 역삼이 강남권 객실 시장에 숟가락을 얹었다. 코오롱 계열 호텔 카푸치노와 내년 오픈 예정인 롯데의 L7 등 콘텐츠를 강화한 호텔들 역시 젊은 고객들을 빼앗아 갔다.

강남 호텔들의 ‘곡성’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다들 저마다 대책에 골몰해 봤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리셋’이다. 컴퓨터가 속을 썩이면 결국 껐다 켜야 한다.
리츠칼튼 서울은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일단 문을 닫는다. 여름 오픈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확실하게 결정된 부분은 아직 없다. 다만, 노후화된 모든 시설을 개보수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6개월 내외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비슷한 규모의 전면 리노베이션을 거친 더 플라자와 서울 신라호텔 역시 비슷한 시간이 걸렸다. 리츠칼튼 브랜드를 뗀다는 풍문도 있었지만 호텔관계자는 강하게 부인했다.
바로 옆 노보텔 앰배서더 서울 강남은 수 년 전부터 객실, 연회장과 레스토랑, 헬스클럽 등을 조금씩 고쳐왔다. 2014년도 초에는 귀빈층 객실과 프리미어 라운지 등을 모던하게 바꿨고, 2015년 초에는 슈페리어 전 객실을 개보수하며 낙후됐던 이미지 개선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2018년 하반기 서울에 세 번째 노보텔이 생기는 부분은 노보텔 앰배서더 서울 강남 입장에서 악재다. KT가 오너인 ‘노보텔 앰배서더 서울 동대문 호텔 앤 레지던스’는 528실 규모에 달하고 루프톱 수영장 등 호화로운 시설을 장착할 예정이라 같은 명찰을 달고 있는 호텔로서 비교가 안 될 수 없다.
인터컨티넨탈 형제는 그간 객실 연회장, 로비, 레스토랑 등을 순차적으로 고쳐가며 대응에 나섰다. 2011년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가 전 객실을 고쳤고,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는 2014년부터 일부 객실을 개보수 중이다. 작년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연회장을 선보이며 시대의 변화에 맞춰 가고 있다. 하지만, 야심차게 추진하던 스타우드의 럭셔리컬렉션 프로젝트가 좌절된 것은 역시 뼈아프다. 올드해진 이미지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대각선 건너편 파크 하얏트 서울 역시 노후화가 진행 중인 객실은 고민이지만 메인 레스토랑 코너스톤을 개보수 하는 것이 더 급했는지 변화는 2층에서 시작됐고 아직까지 특별한 스케줄은 없다.
신세계 그룹 아래로 들어간 JW 메리어트 호텔 서울 역시 전면 개보수 초읽기에 들어갔다. 올해는 아직까지 큰 움직임이 없지만 내년부터는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임피리얼 팰리스 서울은 일단 식음업장을 새롭게 고쳐 변화에 대응 중이다. 기존 업장을 통합하고 확장한 패밀리아 뷔페는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매출도 상승했다. 중식당과 일식당 개보수 계획도 올해 안에 세부안이 확정될 예정이다.
르네상스에서 이름이 바뀐 벨레상스 서울 호텔은 격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토목업으로 잔뼈가 굵은 브이에스엘(VSL)코리아에 낙찰됐지만 아직까지 잔금 납부가 되지 않아 불확실성은 남아있다. 38층 높이의 복합형 건물로 변신한다는 계획이 나와 있지만 기존 직원들의 고용 승계 문제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다들 분주하게 대응하고 있지만 드라마틱하게 전황을 뒤집을 전략 무기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부분적인 리노베이션은 결국 임시방편일 뿐이고 시장의 흐름을 돌리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완전히 새로운 것을 내놔야 고객은 움직인다. 강남역 ‘쉐이크쉑버거’를 줄서서 먹는 세대를 공략해야 흐름이 바뀐다.

여러 변수가 있지만 결국 강남은 강남이고 강남은 불패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여전히 강북보다 강남에 돈이 많이 돈다. 국내 대기업 순위 1위와 2위 기업의 본사가 강남에 있고 판교IT밸리라는 새로운 배후 시장도 생겼다. 호텔 고객의 세대교체와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역할은 결국은 ‘범(凡)강남파’의 몫이다.
_ 전경우 스포츠월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