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욕망을 꽉꽉 눌러 담은 ‘테마파크’가 호텔이라면 바는 그 정점이다. 낮선 도시에서 만나는 한 잔. 그리고 숨막히는 매력을 뿜어내는 미녀와 우연한 만남. 영화에 나오는 호텔 바는 대략 위와 같은 이미지였다.(술에는 독약이 들어있거나 객실로 올라가 침대에 눕는 순간 영혼까지 탈탈 털린 주인공은 곤경에 처하기 마련이다)

우리 조상들은 경치 좋은 곳에 멋들어진 정자를 짓고 술을 마시는 것을 가장 큰 호사로 여겼다. 멀리 나가기 어렵다면 호화롭게 꾸며진 기방에서 주안상과 마주했다.(사극을 보면 비슷한 장면이 수 없이 나온다) 좋은 음식과 향기로운 술이 있고 당대의 파워맨들이 세상을 움직이는(때로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눈다. 아름다운 여자들도 이 자리에 빠질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가장 비슷한 공간을 꼽아보자면 호텔 바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구한말 손탁 호텔이 개관한 이후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시절에도 이 땅에는 호텔이 존재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호텔은 셀 수 없는 만남과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도시의 핵심 시설이었다. 레스토랑도, 바도 당연히 있었다. 경성의 잘나가던 모던보이들은 어떤 술을 호텔 바에서 즐겨 마셨을까? 당연히 양주라고 봐야 한다. 서울 사람들이 위스키를 마신 역사가 100년도 넘었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 위스키가 들어온 것은 다른 양주와 비슷한 시기인 구한말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일본이 위스키를 생산하고 있었기에 명동 등 경성 중심가에서는 위스키를 구경할 수 있었다.

옛날 위스키의 상징과 같은 ‘도라지 위스키’는 훨씬 나중 이야기다. 도라지 위스키라고 알려진 1960년대에 생산된 ‘도리스 위스키’는 기타 재제주로 분류되는데 주정에 일본산 위스키 향 혹은 원액을 섞은 혼합물이었다. 이런 종류의 술로 백양 위스키, 쌍마 위스키 등이 있었다. 1970년대에는 최초로 영국에서 위스키원액이 수입되며 인삼을 넣은 ‘진생 위스키’가 나왔다. 같은 시기 백화양조에서 만든 ‘조지 드레이크’라는 제품은 신문에 ‘오크통에 들어 있던 신비한 액체’라는 표현을 쓰며 광고를 했다. 광고 문안에는 ‘신세계백화점 식품부, 코스모스백화점 식품부, 미도파 백화점 식품부 및 유명 수퍼에서 판매중’이라는 안내가 있어 일반 서민층이 접하기 어려운 귀한 물건임을 짐작케 해준다. 이 시기의 위스키는 대부분 원액이 19.9%만 들어 있는 기타 재제주에 속했다. 그 이후로 ‘1급 위스키’라 불린 30%의 주정이들어간 베리나인, 길벗 등의 제품이 나왔다.

▲ 워커힐_힐톱바

1963년 개관한 워커힐에는 ‘힐톱바’가 있었다. 여기서 일부 특권층은 미군 PX를 통해 들여온 조니 워커와 시바스 리갈 등 ‘진짜 위스키’를 마셨다. 워커힐 개관 당시 동아일보의 ‘달라를 부르는 환락의 궁전 워커힐’이라는 기사를 보면 힐톱바에 대해 묘사한 부분이 나온다. 미국제, 블란서제, 스페인, 독일, 이태리제 등 위스키, 코냑, 브란디, 스코치, 진, 보드카 등 뭐든지 있는데 대개 한 병에 1000원 내외(최고 1500원) 맥주는 국산, 외국산을 막론하고 한 병에 50원, 콜라 한 잔에 40원이다. 워커힐 오픈 당시 숙박 요금은 400원에서 1800원이었으니 지금의 객실 가격과 술값을 비교해 보면 무척 비싼 가격이었다. 힐톱바는 나이트클럽-호텔-빌라-한국관 다음으로 인기를 끄는 시설이었다. 오픈 당시 워커힐은 돈만 있다고 아무나 가는 시설이 아니었다. 유엔군, 외국인 관광객, 그리고 그들이 초대한 한국인이 출입 대상이었다.

▲ 그랜드 하얏트 서울_ J.J. 마호니스

호텔 바의 모습이 크게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올림픽 무렵이다. ‘외국인 손님맞이’는 당시 국가에서 내세운 가장 중요한 과업이었다. 호텔 전체의 수준이 업그레이드되면서 바의 수준 역시 높아졌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의 슈퍼스타는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J.J. 마호니스다. J.J. 마호니스는 ‘마호니’라는 가상의 인물에 한국인이 좋아하는 알파벳 ‘J’ 2개를 붙여 만든 이름이다. 1988년 6월 16일 오픈을 앞두고 신문에 광고도 나갔다. ‘카페도 아닙니다, 디스코텍도 아닙니다, 스텐드 바도 아닙니다, 나이트클럽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하는 사교와 오락의 세계’를 표방한 J.J. 마호니스는 아일랜드바, 생음악 코너, 디스코, 다트코너, 당구코너, 그린하우스, 델리카티슨, 화이어 플레이스, 야외테라스 등 다양한 시설을 전면에 내세웠다. 독립된 출입구와 주차장을 갖추고 70여 개의 스피커와 43개의 모니터가 연출하는 첨단 오디오·비디오 예술은 덤으로 따라왔다.

▲ 그랜드 하얏트 서울_ J.J. 마호니스 오픈 당시 광고

지금 J.J. 마호니스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술은 샴페인이지만 당시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즐겨 마시던 시바스 리갈이 인기를 끌었다. 발렌타인 17년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이 오렌지족의 허세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90년대 당시 직장인들은 폭탄주를 주로 마셨지만 호텔 바에는 언더락 스타일로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90년대부터 몰트위스키만 찾는 마니아적 성향의 손님들도 호텔 바에는 존재했다.
국내에 최초로 도입된 아일랜드 바는 12면체로 커뮤니케이션에 유리한 구조다. 지하에는 창고로 쓰이는 숨겨진 공간에 냉장고가 들어가 있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술을 담은 박스가 오간다. 이 아름다운 바는 아르데코 양식의 럭셔리한 조명이 불을 밝히면 신비로운 분위기가 더욱 살아난다. 다양한 칵테일 메뉴를 오픈 초기부터 선보여 왔는데 굼바붐바, 고 바나나 등 트로피컬 느낌의 칵테일이 지금까지 인기를 누린다.
오픈 이후 계속 J.J. 마호니스를 지키고 있는 그랜드 하얏트 서울 구유회 부장은 ‘테마파티’를 J.J. 마호니스의 강점으로 꼽았다. J.J. 마호니스의 테마파티는 중국의 트렌드 세터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하다. 파티 기간에 맞춰 중국의 VIP 손님들이 J.J. 마호니스에 테이블을 예약하고 서울로 날아오는 모습은 이미 익숙한 풍경이 됐다.

▲ 서울 웨스틴조선호텔_ 오킴스

J.J. 마호니스의 영향 탓인지 90년대 호텔 바의 필수 시설은 포켓볼 테이블이 됐다.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의 오킴스는 아일랜드 서민문화의 분위기를 흠뻑 느낄 수 있는 아일랜드식 펍 앤 스포츠 바를 내세워 인기를 끌었다. 오킴스는 1989년 12월, 부산의 웨스틴조선비치호텔에서 시작됐고 서울에서 1991년 10월 문을 열었다. 오킴스란 아일랜드인의 이름 앞에 흔히 붙이는 `오'와 한국인의 성 중 가장 흔한 `김'을 합쳐 만든 이름. 굳이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김씨네 집, 김씨 아들 혹은 딸네 집이란 뜻이다. 1994년 12월 2일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당시 오킴스의 주요 고객은 20대에서 50대까지 고객들이 무료로 제공되는 당구와 다트게임, 기네스의 벨벳 같은 거품을 즐겼다. 하루 손님은 100~150명 가량이었다.

▲ W 서울 워커힐_ 우바 DJ 부스

한남동과 청담동에서 스피크 이지를 표방한 바들은 호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2004년 개장한 W 서울 워커힐의 우바는 칵테일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며 수많은 바텐더들을 배출했다. 우바의 가장 큰 업적은 바텐더에게도 이름이 있고 저마다 다른 한 잔을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21세기를 바라보던 시점에서 음악과 패션, 예술은 한 잔의 모히또에 고스란히 녹아들며 젊은층에 새로운 즐거움을 선물했다.
호텔 출신 바텐더들은 파크 하얏트 서울의 다이닝 바 팀버하우스, JW 메리어트 동대문스퀘어 서울의 그리핀 바 등 새로운 업장이 생길 때 마다 점점 두터운 세력을 만들어갔다. 디아지오가 주최한 월드클래스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리츠칼튼 서울 리츠바의 엄도환 바텐더는 같은 대회 출신인 임재진 바텐더와 청담동 르챔버를 오픈하며 오너 바텐더 시대를 활짝 열어 젖혔다. 호텔리어 출신 바텐더들이 청담동 등 유입되며 경쟁은 치열해졌다. 호텔의 체계적인 시스템 아래서 성장한 그들은 작은 업장 특유의 빠른 순발력으로 트렌드를 주도하며 호텔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W 서울 워커힐 우바와 JW 메리어트 동대문스퀘어 서울 그리핀 바를 거쳐온 앨리스 청담의 어드바이저 김형규(호야 킴)는 “호텔의 강점은 견고함과 일관성이지만 트렌드를 따라가는 부분에서 일반 업장보다는 느리다는 약점이 있다”라며 “하지만 호텔은 지금까지도 소프트웨어적인 부분을 전수하는 부분이 있다”라고 호텔과 청담동 바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 W 서울 워커힐_ 우바

옛날이야기 한 참 늘어놨으니 이제 현재와 미래를 논하며 마무리 할 차례. 포시즌스 호텔 서울의 찰스 H. 바는 가장 최근에 오픈한 곳이다. 바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결국은 손님들이다. 그 동안 서울 호텔들이 겪어온 히스토리가 결국은 찰스 H.에 녹아있다는 뜻이다. 찰스 H.의 헤드 바텐더 Christopher Lowder은 뉴욕 출신이다. 그가 한국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당황했던 질문은 “너의 시그니처는 무엇인가?”라는 손님들의 질문이었다. 수많은 오리지널 레시피를 갖고 있는 그에게 시그니처 메뉴는 따로 없다. 그저 자신의 칵테일을 만들 뿐이다. 그는 한국의 바 문화에 대해 “바텐더 개인의 재량이 극대화된다는, 그리고 바텐더들이 자신의 레시피를 공유하지 않고 숨기는 듯하다”라고 말했다. 시스템과 팀워크를 중시하는 호텔 바에서는 자칫 독이 될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바텐더와 손님의 유대감에 대해서 “바텐더는 머리를 자르는 이발사와 비슷하다.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느껴지는 부분이 비슷하다”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 포시즌스 호텔 서울_ 찰스 H. 바

그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가고 있는 찰스 H의 강점은 직수입과 토종의 콜라보레이션이다. 그 동안 서울에 새로 오픈한 바, 특히 호텔 바는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유산을 물려받은 바텐더들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다. 이제 우리나라 바 문화도 글로벌 기준에서 상당한 수준에 진입했지만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시점에 적절한 인물이 들어왔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부분이다.
“따라해야 하는 ‘선생님’이 없다는 것이 찰스 H.의 강점이다. 누가 우월한 것도 아니다. 나도 서울의 바텐더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무척 재미있게 일하고 있다”라는 그의 말을 들어보면 찰스 H.는 뭔가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포텐셜이 충분하고 넘쳐 보인다. 바는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한 공간 이라면 그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일하고 있다”는 것은 가장 큰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_ 전경우 스포츠월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