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갱스터 영화에는 미국의 여러 고급 호텔들이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호텔들은 한때 그들 소유였기 때문이다. 60년대 들어 마약을 주 수입원으로 삼기 전까지, 미국 마피아들은 주로 주류 판매나 사설 경마와 같은 도박 산업을 통해 검은 돈을 벌었다. 호텔 비즈니스는 그 검은 돈을 합법적인 사업으로 돌릴 수 있는 좋은 통로였다. 금주령 시대와 대공황 시대를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마피아 조직들은, 1940년대에 이르면 절반에 가까운 미국 호텔들의 소유권이나 경영 지분을 갖기도 했다. ‘총과 장미의 나날들(Days of Guns and Roses)’이라 불리며 낭만으로 채색된 이 시기 갱스터들의 삶은 도시전설로 대중들 사이를 떠돌다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 중 호텔이 인상적인 갱스터 영화로 「벅시」(1991)가 있다. 이 영화에는 로스앤젤레스의 ‘리젠트 비버리 월셔 포 시즌스’, 라스베이거스의 ‘플라밍고 호텔’, 그리고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위치한 ‘호텔 나치오날 데 쿠바’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베리 레빈슨 감독의 「벅시」는 실존했던 뉴욕 갱스터 벤자민 ‘벅시’ 시걸을 소재로 한 영화다. 지난달 글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벤자민 시걸은 라스베이거스 최초의 호텔인 플라밍고 호텔을 세운 사람이다. ‘벅시’는 그의 별명인데, 우리말로 옮기면 ‘버러지’쯤 되겠다. 하는 짓이 여간 잔인해서 붙은 별명이라고 하는데, 영화에서는 너무 미화된 면도 있다. 이는 주인공 역을 맡은 워렌 비티 때문이기도 하다. 벅시는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로 이름을 날리던 희대의 바람둥이 갱스터였는데, 워렌 비티 역시 그 분야라면 할리우드의 최고봉이니까. 영화는 벅시가 경마도박 사업을 서부로 확장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친구 죠지의 영화촬영 현장에서 여배우 버지니아 힐(아네트 베닝)을 만나고 첫눈에 반한다. 이후 그가 어떻게 사업에 성공하고, 버지니아 힐과의 사랑을 성사시키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는 네바다 사막 한가운데에 호텔과 카지노를 짓다가 동료 마피아의 총에 맞아 죽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의 배경으로 로스앤젤레스의 최고급 호텔인 리젠트 비버리 월셔 호텔이 여러 번 나온다. 「귀여운 여인」(1990)에서 20대의 줄리아 로버츠가 화려한 스위트룸을 보며 괴성을 지르던 그 호텔 맞다. 1928년 건설된 리젠트 비버리 월셔 호텔은(지금도 그렇지만) 1940년대에 로스앤젤레스 사교계의 중심지였다. 영화에서 보이는 40년대 풍의 호텔 내부 모습은 럭셔리 그 자체다. 할리우드 스타들과 유명 인사들이 모여드는 호텔의 재즈 클럽과 바에서 주인공 벅시와 버지니아 힐은 서로를 유혹하고 유혹당한다.

하지만 「벅시」의 진짜 배경은 플라밍고 호텔이다. 베리 레빈슨 감독은 촬영을 위해 네바다 사막에 개장 당시의 플라밍고 호텔을 영화 세트로 재현했다. 호텔의 이름인 ‘플라밍고’는 버지니아 힐의 예명이다. 잔악무도해서 ‘버러지’라는 별명을 가졌던 깡패 벤자민 시걸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딴 호텔을 짓는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으로 동료들의 총에 맞아 죽는다. 1946년 크리스마스에 개장한 이 카지노 호텔은 처음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도박이 합법인 네바다 주(州)에 위치한 호텔이라는 매력에 이끌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결국은 지금의 라스베이거스라는 환락의 도시가 건설됐다. 벅시 시걸은 스무 발이 넘는 총탄에 맞아 죽었고, 버지니아 힐은 오스트리아에서 자살했지만, 플라밍고 호텔은 아직도 라스베이거스에 남아서 영업 중이다. 한 남자의 염원이 만들어낸 기적이랄까. 수많은 호텔들이 세워졌다 사라져간 라스베이거스에서, 1960년 이전에 개장한 호텔은 플라밍고가 유일하다. 물론 현재의 플라밍고가 최고급 호텔은 아니다. 여러 차례 리노베이션을 거쳤어도 이미 낡고 작은 호텔에 불과하다. 하지만 라스베이거스에 들른다면 한 번쯤 이 호텔을 찾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플라밍고 호텔 로비에 걸린 벅시 시걸의 사진을 보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어리석은 남자의 집념을 찬미하기 위해서라도.

「벅시」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매력적인 호텔은 바로 ‘호텔 나치오날 데 쿠바(Hotel Nacional de Cuba)’다. 우리말로 옮기면 ‘쿠바국립호텔’이다. 영화에서는 벅시의 동료 마피아 보스들이 벅시를 제거할 것을 결정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카메라는 해안 절벽 위에 위치한 호텔의 원경에서부터 시작하여, 로마네스크 풍의 호텔 정면을 한동안 보여주고, 웅장한 열주(列柱)가 세워진 고색창연한 로비를 지나, (프리다 갈로의 남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가 걸린 프레지덴셜 스위트까지 보여준다. 이 호텔은 1928년에 미국의 건설업자가 말레콘 해안 절벽에 위치한 포병대 진지를 허물고 1930년에 완공한 것이다. 이 당시 쿠바 공화국은 미국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는데, 쿠바 대통령 헤라르도 마차도는 미국인이 짓는 호텔에 ‘쿠바국립호텔’이라는 명칭을 허락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호텔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는 쿠바정부가 영구히 소유한다는 조건이었다. 나라의 이름을 팔아 대통령 전용 스위트룸을 손에 넣겠다는 독재자의 사욕이 서린 호텔이기도 하다. 1959년 1월 1일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쿠바혁명에 성공하면서, 이 호텔은 혁명정부에 무상 몰수되었다. 2014년 12월, 오바마 미국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평의회장은 미국과 쿠바의 국교정상화에 합의했다. 한국 역시 쿠바와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협의 중이라는 소식을 얼마 전 들었다. 앞으로 쿠바여행이 지금보다 더 자유로워지면 아바나의 ‘호텔 나치오날 데 쿠바’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비록 라틴 아메리카 최고의 럭셔리 호텔 숙박비를 감당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영화 「벅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위의 세 호텔들이 아니라, 전성기의 여배우 아네트 베닝의 모습이다. 아네트 베닝은 이 영화에서 버니지아 ‘플라밍고’ 힐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녀가 반짝이는 푸른 눈으로 벅시에게 사랑을 갈구할 때, 나는 왜 남자가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거는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벅시 역을 맡았던 워렌 비티 역시 마찬가지였을까. 그는 영화를 찍고 난 다음해 아네트 베닝과 결혼했다. 프랑스에 영화 촬영하러 갔다가 브리짓드 바르도와 이자벨 아자니라는 두 국민 여배우의 마음을 훔쳐 프랑스인들이 그의 입국금지를 청원하게 만들었던 할리우드의 자존심이, 55세의 나이에 스물한 살이나 어린 여배우와 결혼하여 정착하다니. 많은 호사가들이 둘의 결혼생활이 비극으로 끝날 것이라 예상했건만, 두 사람은 4남매를 낳고 23년째 행복하게 살고 있다. 영화 「벅시」의 비극적 결말과는 달리, 워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은 “Happily ever after”라는 동화적 결말을 실행 중이다. 그러니 제2의 워렌 비티의 길을 걷고 있는 조지 클루니여, 분발하기를!

_배호남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