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꽃’이 온 나라에 만개하는 4월이다. 벚꽃 대선이 현실이 됐다. 5월 9일 D-day를 앞두고 있는 4월은 대한민국 전체가 ‘대선모드’로 움직인다. 정부기관은 대선 스케줄에 맞춰 모든 업무가 진행되며, 기업은 향후 대권의 향방을 감지하기 위해 일찌감치 안테나를 바짝 세웠다. 직장에서도, 술자리에서도, 집에 돌아가서도 온통 4월은 정치 이야기뿐이다. 호텔 역시 마찬가지다. 대선을 앞둔 호텔가는 바쁘다. 선거법에 위반 되는 공식 모임은 없지만 온갖 비선 모임들이 늘어난다. 중요한 정보는 대면한 자리에서 나온다. 정치인과 기업인, 지켜야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시내 호텔의 내밀한 공간에 모여 그림을 그린다. 영화가 아닌 현실 속 장면이다. 여의도가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면 ‘정치 0번지’는 특급호텔이 아닐까 싶다.

일천구백사십오년 시월 십육일 오후 다섯시, 미군용기 한 대가 김포공항에 백발의 노인과 미군 장교들을 내려놨다. 중절모를 손에 들고 회색 양복을 입은 백발의 노인의 이름은 이승만, 그는 오랜 망명 생활 끝에 33년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좁고 구불구불한 김포가도를 달려 한강다리를 건넌 미군 장군용 차량은 노인을 소공동 조선호텔 현관에 내려줬다.
조선호텔 3층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한 이승만 박사는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 존 알 하드 중장과 미군정장관 에이 아놀드 소장을 시작으로 온갖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며 서울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한다. 서울의 한복판 조선호텔은 정치활동을 펼치기에 최고의 요지였다.
서울의 봄은 후끈 달아올랐다. 모스크바3상회의, 미·소공동위원회가 연달아 열렸지만 해방조국의 운명은 여전히 안개 속을 걷고 있었다.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열리고 좌익과 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혼돈의 시대, 야망이 있던 남자들은 시내 호텔에 모여 각자의 그림을 그려 나갔다. 호텔은 회의실이었고 상황실이었다. 식당이 되기도 했고 술집이기도 했다. 잠시 눈을 붙이며 피곤한 몸을 달랬다. 유독 몸이 뜨거운 어떤 이는 남의 눈을 피해 정부와 밀회를 즐기기도 했으리라.
이승만은 결국 1948년 8월 15일 제헌국회의원 198명의 힘을 빌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다. 이후 한국 전쟁이 터졌고 발췌 개헌으로 국회의원들이 감금 되는 등 온갖 사건들이 벌어졌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대통령 자리를 지켰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선물 받은 1956년식 캐딜락 플리트우드 62 세단을 타고 조선호텔에 들어서는 모습은 멋들어졌다. V8기통 OHV 엔진 6000cc, 230마력의 검은 세단이 태평로를 지날 때면 구경하는 인파가 구름같이 모였다.
권력의 정점에는 국부로 칭송되던 노인이 있었지만 그 단물을 빨아먹은 것은 이기붕을 위시한 가신 군단의 몫이었다. 이기붕은 반도호텔을 유독 좋아했다. 반도호텔은 한국 정치의 심장부였다. 조찬당무회의가 열렸고 공천심사도 이뤄졌다. 모든 결정은 이기붕이 머물던 809호실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경무대와 중앙청, 태평로 국회의사당에서 공식적인 회의와 행사들이 치러졌지만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주요 장면은 반도호텔 깊숙한 밀실에서 나왔다. 자유당 세력은 1954년 대통령 연임 제한을 폐지하는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며 무서울 것이 없었다. 1950년부터 1960년 사이 그들은 대중시위를 조작하기 시작한다.(하루 이틀 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국토를 양분시켰던 공산주의자들과의 휴전협정을 반대하는 대중시위와 행진, 1952년에서 1956년의 기간중 이승만을 재선에 나서도록 1960년 3월 부정선거가 극에 달했다. 이기붕은 장면을 밀어내고 스스로 부통령이 되고자 무리수를 뒀다. 반도호텔에서 밤을 하얗게 지새운 나날들은 그를 결국 부통령 당선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마산상고생 16세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에서 떠오른 그날 모든 것이 무너졌다. 1960년 4월 19일 반도호텔 VVIP고객 리스트에서 ‘이기붕’이라는 이름이 지워졌다. 이날 투숙객인 외국인 윌칵스가 시위대에게 발포한 유탄에 맞아 숨지는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다.

서울의 봄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강대교는 해병제1여단과 2개 공정대대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30사단이 주둔지 수색을 떠나 시내로 진격했고 6군단 포병이 뒤를 따랐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쿠데타세력의 등장이다. 이들의 전략적 목표는 방송국과 관공서, 그리고 반도호텔이었다. 장면 총리는 반도호텔을 집무실과 관저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가 머물던 방은 이기붕이 사용하던 809호였다. 혁명의 새벽, 장면총리는 피신을 권하는 전화를 받고 화들짝 놀라 맨발로 도망을 쳤다. 혁명 세력 핵심이던 P소령은 기관단총을 메고 호텔을 급습했지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혁명을 준비하며 반도호텔과 메트로호텔, 아스토리아호텔 등 민주당 간부들이 오가던 호텔들을 면밀히 살펴왔지만 대어를 잡는데 결국 실패했다.

새로운 시대가 왔지만 ‘호텔정치’는 여전했다. 반도호텔 ‘코피숍’에서 오갔던 이야기는 그대로 현실이 됐다. 반도호텔은 일본인 토건업자 노구찌가 세웠다. 그는 흥남비료공장과 수풍댐을 건설한 ‘일본공영’의 사장이다. 노구찌는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조선호텔에 투숙하려다 프런트에서 내쫒기고 홧김에 반도호텔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53년 재개관 직전까지 이 호텔은 미군이 관할했는데 그들은 엠바시호텔이라는 명칭을 썼다. 반도호텔은 1960년대까지 서울 최고 높이와 시설을 자랑하는 군계일학이었지만 1974년 7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재일교포 기업가 신격호가 사들인 반도호텔은 지금의 롯데호텔이 된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 역시 시작은 호텔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CP는 당시 최신 시설을 자랑하던 롯데호텔이었다. 신군부는 서울북악파크호텔에 작업반을 꾸렸고 서울프라자호텔에 본부를 차려 민정당 창당 모임을 갖기도 했다. 민정당은 그 뒤로 꾸준히 사무총장의 전용객실을 프라자호텔에 운영했다.
이후 롯데호텔을 집무실로 썼던 것은 YS 정권의 ‘비선실세’ 김현철 씨다. YS는 신격호 회장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대통령 당선 이전에도 롯데호텔을 자주 이용했다. 이런 배경 탓인지 김현철 씨는 롯데호텔 신관 스위트룸 3264호실을 개인 집무실처럼 썼다. 당시 이 객실의 숙박료는 93만 원. 롯데호텔측은 룸서비스 비용 이외의 숙박료는 받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도 당선인 신분일 때 롯데호텔 31층을 로얄 스위트룸을 집무실처럼 썼다. 한동안 가족들도 여기 머물렀다. 장경작 전 롯데호텔 사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고대 61학번 동기다. 이명박 정권의 초기 멤버들은 교통이 편리하고 기자들을 따돌리기 용이한 롯데호텔에서 조각 작업을 진행해 당시 ‘小청와대’라는 이름까지 생겼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호텔을 자주 이용했다. 1987년 12월 16일 치러진 대선 뒤, 당시 당선인 신분이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각계각층의 인사를 만났다. 대상자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약속장소인 신라호텔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과 함께 이 자리에 나왔다.

2010년 9월 15일 국민일보 기사 제목은 ‘3일에 한 번 박근혜의 유별난 호텔사랑’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일 년간 서울 12개 호텔 비즈니스센터 요금을 109회 결제했다고 전한다.
이 시기 박근혜 전 대통령은 리츠칼튼 서울을 가장 많이 방문했고, 임피리얼 팰리스 서울과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가 뒤를 이었다. 이 기사에서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대선 주자로서 많은 사람을 만난 것을 알 수 있다”며 “다만 비공개 만남이 많아질수록 폐쇄 정치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보니 정확한 지적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해외 순방시 호텔 변기를 교체해 달라 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며 ‘변기공주’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도 얻게 됐다.

1967년 개관한 타워호텔은 3공화국을 상징하는 장소다. 개관식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테이프 커팅을 직접 했다. 김종필, 이후락, 차지철 등 공화당 정권 실세들은 주로 이 곳에서 손님을 만나고 축하연을 열었다. 타워호텔은 신군부가 부정축재자 수사를 하며 이후락, 김종필 등이 실소유주라는 소문을 털어봤는데 사실 무근이었다. 1963년 개관한 워커힐도 박정희 시대와 연관 깊은 호텔 중 하나다. 아차산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이 있었는데 이곳을 박정희는 주한미군을 위한 휴양소로 개발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현 워커힐의 오너가인 SK가의 일원이니 아차산과 대통령은 뗄 수 없는 관계다.
노무현 대통령도 호텔을 자주 이용했지만 별다른 에피소드는 없다. 소탈한 성품 탓도 있지만 그는 ‘밀실’이라는 단어를 극도로 혐오했다.

이번 대선후보들은 호텔과 특별한 인연이 보이지 않는다. 호텔에 대한 네거티브한 인식이 몸을 사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구 1000만이 모여 사는 거대도시 서울에서 내밀한 모임을 갖기에 호텔만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후보 캠프의 일원들은 시내 모처 호텔에 모여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역사에 남을 것이다.